부재중 전화 - 히페갈가
부족할 것이라곤 전혀 없는 남자였다.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담당자를 통해 히페리온을 소개받은 헤르만은 몇 번에 걸친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빛에 그가 조금은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첫인상은 그랬다.
벨 소리가 두 번 울리기 전에 손을 뻗어 수신자를 확인한 남자는 정리하던 자료를 내려놓고 곧바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이젠 매우 익숙해진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들려왔다.
“오늘은 시간이 되나, 헤르만?”
여유가 되어 조금 일찍 나온다는 게 티가 나버렸는지, 그를 발견하고 다가온 남자는 검은 목도리 속 빨갛게 물든 뺨을 보고 비식 한 번 웃었다. 신사적이고 깔끔하며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새 자기도 그에게 끌리고 있었다. 음울한 자신과는 달리 그는 태양같이 당당했다.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헤르만과는 다른 깊이가 느껴졌다. 히페리온은 그런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뭘 그렇게 쳐다보나.”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아무것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삼킨 헤르만은 잔을 내려놓으며 초점을 금발에 맞추었다. 눈 폭풍이 몰아치는 황야에서 곧 눈발이 멈추고 먹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추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을 전부 내맡기기엔 본인이 너무 닫힌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얼추 필요한 자료를 다 모은 그는 긴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정리를 다 하고 나서야 원고지를 꺼내 든 순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무런 문장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유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겠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원인 모를 공포감이 다가왔다. 헤르만이 자주 사용하던 문장처럼 심연에서 무수한 눈들이 쳐다보며 집어삼킬 듯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생각나지 않은 시점에서 먹혀버렸을지도 모른다. 태양이 있다 한들 잠식되지 않게 하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해야 할 일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도를 떠나 이건 온전히 그의 잘못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홧김에 구긴 원고지를 모아 펼쳐 한 곳에 가지런히 쌓아둔 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결심했다면 빨리하는 게 서로에게 덜 힘들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이 시각에 그쪽이 먼저 전화도 하고. 웬일인지.”
“...히페리온.”
아마 다시는 못 부를 것 같은 이름을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입에 담아보았다.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 망설이다가는 이대로 전화를 끊을 것만 같아 다물었던 입술을 다시 열었다.
“그만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해주려고, 전화했습니다.”
무슨 소리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말은 했으니 얼굴을 거둬 통화종료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마음을 정리하고 시간이 지나면 문장이 써지겠지. 나태했던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전화를 내려놓기도 전에 방금 전에 헤르만이 걸었던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몇 번 울리다 말더니 금세 또 울리기 시작했다. 새카맣고 커다란 덩어리가 마음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사이에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크게 와 닿았다. 흐르는 물줄기에 손을 담글 수가 없었다. 그 날 밤, 남자는 물을 틀어놓은 채 한참을 소리죽여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