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icus - 아벨갈가

연성/2차 2015. 2. 1. 21:02 |

글을 쓸 땐 공백기간을 두지 맙시다



  끊임없이 말을 전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하니, 문득 밑도 끝도 없는 심연으로 떨어진 그녀, 케이가 생각났다. 지금은 갈가마귀 그 혼자만이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그녀의 생사여부를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이후로도 여전했다.

   “그 때 걔... 케이였나? 생각나는데. , 미안해요. 괜히 말 꺼냈네. 그런데 며칠 전에 본 거 같아서요. 아주 멀쩡하게.”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니 피오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흰 옷을 입은 사람이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익숙한 책을 보고 계시네요.”

  구절 하나가 눈에 띄어 집중을 하던 도중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파란 천에 금실로 수놓인 옷을 입은 남자가 미소를 머금은 채 서 있었다. 익숙한 색. 그것은 성직자라면 더 봤을 법한 서적이겠지.

   “무슨 일이오.”

   “혼자서 탐구하는 거라면 같이 할까 싶어서요.”

  와글와글한 사람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글자에 집중하긴 그른 듯싶어 책을 탁 덮어버렸다. 요 근래에 일에 집중하려고 하면 한 두 명씩 훼방꾼이 끼어드는 건 기분 탓이리라. 조용한 곳에 가 고해나 해야겠다 싶어 자리에 일어나려고 하자 하얀 손이 코트로 덮인 그의 어깨를 짚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 와도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넓은 저택 안의 홀에 발을 들인 뒤였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녀의 얘기에 판단력이 흐려져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메모된 곳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여차하면 심연을 열어 도주할 길을 마련해놓을 생각하며 주변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하리만큼 집 안은 조용했다. 사람이 살법한 온기와 쥐새끼 하나 없는 적막이 부조화를 이뤄 위화감이 느껴지게 했다. 아까부터 이곳에 희미한 보랏빛 연기가 가득 메우고 있다는 걸 자각했을 땐,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일어났나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교차된 색의 천장이었다. 몸을 일으켰으나 둔한 감각에 익숙하지 않아 온 몸에 힘을 주고 나서야 할 수 있었다.

   “수면 가스를 마셨으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무리는 하지 마요.”

웅웅거리는 소리가 조금 가라앉자 목소리가 깨끗하게 들려왔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지만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며칠 전과 봤던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벨.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압니까?”

   “그럼요. 알고 있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탈일 지경이에요.”

  신에게 무엇을 바란다는 것 자체는 이미 저버린 지가 오래였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발톱 사이의 파편이 점점 그를 먹어버릴 듯이 자라기 시작했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사람을 찾아 나섰다. 자신과 함께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사람을. 그러던 도중 헤르만이 눈에 띄었던 것이었고. 갈가마귀가 케이를 찾고 있었다는 걸 알아낸 아벨은 떠오른 계획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렇게 쉽게 걸려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은 한결 수월해져서 좋네요.”

  쇠창살 사이로 흰 소매가 걸린 손이 들어와 아직까지 둔감한 검은 사내의 목을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갈수록 졸라오는 목에 헤르만은 무언가가 걸린 소리 밖에 내뱉지 못했다.

   “신을 찬양하던 두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는 건 멋지지 않나요? 생각만 해도, 아아. 이렇게 보니까 엄청 예쁜 거 알아요, 당신? 이렇게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도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못 보겠지만. , 하하.”

  살고 싶었다.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생각이 흐려져 가는 머릿속에 가득했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다시 까무룩 하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목걸이의 힘으로 폭주해버렸을 때의 당신은, S라고 했던 걸. 안 그런가요, 그림자의 왕?”

  옆구리에서 네버모어가 쑥 뽑혀 나오면서 한 차례 피를 토해낸 아벨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이미 알고 있던 헤르만이 아님을 직감했다. 새카만 불꽃이 일렁이는 것만 같은 그림자에 감싸여 있던 그는, 대리석 바닥에서 심열을 열어 유유히 그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Posted by 핑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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